[안태근의 영화100년사] 영화관의 탄생

안태근 | 기사입력 2022/11/22 [11:07]

[안태근의 영화100년사] 영화관의 탄생

안태근 | 입력 : 2022/11/22 [11:07]
                                                        안태근(문화콘텐츠학 박사/한국영화100년사 연구회 회장)

 

▲ 초창기 필름 영사기인 비타스코프(Vitascope) 포스터  © 인디포커스



극장은 연극과 오페라, 뮤지컬, 영화 등이 공연되거나 상영되는 무대와 스크린, 객석을 갖춘 공공장소이다. 극장의 역사는 인류 문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문화의 구심점이었다. 영화 상영관으로서의 극장은 필름, 관객과 더불어 영화를 규정짓는 3요소 중에 하나이다. 한때 동네마다 극장이 몇 군데씩 있었는데 요즈음은 영화의 외형적인 상영 형태 변화에 따라 멀티플렉스화되어 중심가에 몰려있다. 그나마도 OTT시대를 맞아 각 플랫폼과 채널의 성장에 대응해 고급화 추세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영화의 기점이 관점에 따라 달라지듯이 극장의 역사도 그 기능과 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성양이 극장과 영화관의 구별이 뚜렷했던 것에 비해 우리네 극장은 1970년대까지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극장에서 연극이나 악극, 쇼 등의 공연도 하였고 동네 사랑방으로 역할을 하였다.

 

시기 별로 스크린이 대형화되며 요즈음은 아이맥스 전용관이 생기고 영화상영관으로서만 이용되고 개인에게 대여해주는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극장가는 한동안 호된 불황을 겪었다. 인류문명과 함께 긴 역사를 갖고 있는 극장이 사라질 일은 거의 없다고 하지만 예상치 못한 질병 발생에 대책이 필요하다.

 

 

영화는 1888년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 개발한 롤 형태의 필름을 세상에 선보이며 가능해졌다. 이 롤 형태의 사진 필름은 장시간 촬영하고 영상 재생이 가능하게 되었다. 영화사가들에 의해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공식 인정을 받자 에디슨도 비타스코프를 1896423일 뉴욕에서 공개했다. 그해에는 미국 및 각국에서 여러 가지 영사기들이 많이 등장했다. 이후 야외로 이동 가능한 시네마토그래프가 뤼미에르 형제의 의해 개발되어 소형화 되었다. 당시에는 극장보다는 간이식 가설극장이 운영되었다.

 

 

영화의 시작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에디슨 같은 선각자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흔히 뤼미에르 형제를 영화의 아버지로 알고 있지만 그보다 앞서 에디슨이 있었던 것이다. 단 에디슨은 스크린으로 보는 극장식이 아니기에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영화의 이동 상영은 필연적으로 극장의 탄생을 가져왔다. 연극을 위한 공연장이 아닌 영사기와 스크린을 설치한 본격적인 극장의 탄생이다. 처음에야 사람들이 모여서 볼 수 있는 가설극장 형태에서 본격적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극장은 꿈의 공장이었다. 볼거리에서 스토리텔링을 갖춘 영화가 등장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영화는 탄생과 함께 제7의 예술로 자리 잡았다.

 

1911,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리치오토 카뉴도는 <7예술선언>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최초로 영화를 제7의 예술로 명명하였다. 그것은 연극, 회화, 무용, 건축, 문학, 음악 다음으로 영화가 당당히 자리 잡은 것이다. 이로서 영화는 그 탄생을 아는 유일한 예술이 되었다.

 

영화 초창기에는 필름의 길이가 50피트(1,524cm)가 한도이고, 매초 48프레임의 속도로 보여졌는데 1회 상영 시간은 13초가량이었다. 1초에 보이는 화면 수는 훗날에는 매초 16프레임으로 줄어 무성영화 시대의 표준이 되었다. 토키(유성)영화의 경우에는 매초 24프레임이 표준이었고 애니메이션은 매초 18프레임으로 정해졌다.

 

볼거리인 영화에 스토리가 가미된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1903년 에디슨 회사의 에드윈 포터가 감독한 대열차 강도(The Great Train Robbery)가 시작이었다. 8분 정도의 길이였지만, 본격적인 극장 시대를 열었다. 초기 니클오디언(5센트 극장)이 생겨나며 대열차강도는 영화의 산업성을 보여주었다.

 

초창기 무성영화는 자막과 음악 반주로 스토리를 전개시켰다. 동양에서는 변사라는 특별한 직업이 탄생했는데 만담 풍으로 영화의 내용을 들려주었다. 이는 영화 외적인 재미를 주는 것으로 관객들을 영화 속 세계로 끌어주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영화를 재창조하며 배우 이상의 인기를 끌었다.

 

영화는 시공간을 아우르며 전개되는 혁신적인 탈바꿈을 한다. 축음기의 발명은 1877년이며 1887년에 음악을 대중화 시켰다. 최초의 유성영화는 1927년의 재즈 싱어(The Jazz Singer)에 의해 영화계는 한 단계 도약을 하며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영화는 초기의 디스크식 음향장치를 탈피해 프린트에 사운드 트랙을 구비해 동시 발성되었다.

 

1932년에 개봉된 월트 디즈니의 숲속의 아침(1932)은 테크니컬러에 의한 최초의 컬러영화가 되었다. 루벤 마물리언의 베키 샤프(Becky Sharp)(1935)는 최초의 장편 컬러영화이다. 1939년 개봉영화 <오즈의 마법(The Wizard of Oz)>는 본격적인 컬러 영화 시대의 개막을 알린다.

 

전성기를 맞이한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도 1948년 말경부터 관객이 텔레비전으로 몰리자 그 타개책으로 1952년에 대형영화인 시네라마와 입체영화를 개발한다. 같은 해 20세기 폭스사는 세로 대 가로의 비율이 1 2.3의 비율인 시네마스코프를 개발해 선보였다. 1953년 제1회 작품인 성의(聖衣/The Robe)의 대성공 이후, 전 세계에 보급된다.

 

이러한 외형적인 변화와 발전의 기저에는 스토리텔링의 영상 구현이 한 몫을 차지한다. 인간이 상상해낸 모든 것을 영상으로 표현하며 영화는 고학기술을 혁명적으로 바꾼 선도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수많은 SF영화(공상과학/science fiction film)가 그 증거이며 인류는 영화가 보여준 과학문명을 하나하나 구현해 나가고 있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이메일 : khh933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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