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근의 영화100년사] 상해파 한국영화인 최채 인터뷰 ②

안태근 | 기사입력 2022/02/01 [01:59]

[안태근의 영화100년사] 상해파 한국영화인 최채 인터뷰 ②

안태근 | 입력 : 2022/02/01 [01:59]

▲ 안태근(문화콘텐츠학 박사/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인디포커스

 

[인디포커스/안태근논설위원]최채 선생은 상해파 한국영화인으로 최종 생존자였다. 최채 선생을 만나게 된 건 행운이었다. 1997년 상해파 한국영화인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EBS 다큐멘터리 <일제강점기의 영화>를 촬영하고 방송이 나간 후였다. 이 사실을 논문으로 쓰기 위해 연구를 계속하던 나는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3 예술사의 내용 중에서 최채 씨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저자인 박찬구 씨와 국제전화 후 그야말로 긴 추적 끝에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 국제전화를 드리고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와 2000년 추석, 중국 연길시 자택에서 가졌던 인터뷰 중에서 정기탁 감독의 상해파 한국영화인1930년 고성영편공사 제작의 <양자강> 관련 부분이다.

 

  © 인디포커스

 

(전략)

: 특히 소년 시절에 상해에서 공부하면서 전창근, 정기탁과 종종 내왕한 적이 있었다는데 그들과의 교류 얘기를 들려주세요.

: 이 말이야... 그러니까 그 때 말이야... 열 여섯 살 때였을 겁니다. 초등 3학년인가 그 땝니다. 그 때 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예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연극이나 이 방면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때 말이지... 정기택이와는 그렇게 잘 알지 못합니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상해 인성학교에 미술교원으로 있었습니다. 그래... 전창근이를 알게 됐죠. 전창근이가 정기택이가 와가지고 안중근 이 사진 박을 때 역시 전창근이가 거기 참가하게 됐죠. 왜 그런고 하니 전창근이가 나운규하고 친굽니다. 나운규 있지 않습니까? 같은 회령 사람이거든요... 친구거든요. 본래 그 사람도 미술하면서 영화 관문에 대성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정기택이가 오게 되니까 <안중근>을 촬영하게 되면서 그 정기탁이와 함께 일하게 됐습니다. 대중화영화공사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그래 가지고 말이야... 전창근을 알게 되면서 정기탁도 알게 됐죠. 리경손은 후에 왔습니다. 좀 늦게 왔습니다.

: 영화 <양자강>에서 어떤 분야의 일을 하셨습니까?

: 중요하긴 내가 상해 말을 잘 하고 하니까... 통역할 사람이 없으니까... 내 또한 영화를 좋아하고 하니까 전창근이와 리경손이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내가 거기서 <양자강>할 때 이경손이 조수로서 한족 배우들을 많이 쓰게 되니까 그 배우들한테 한족말로써 번역하고서 정신이 없었죠. 조수 공작을 했습니다. 그 때 말을 말이야... 조리연출이라 했죠.

: <양자강>의 감독인 이경손 감독에 대해서 아시는대로 말씀해주세요.

: 아주 학자... 그 분은 말이야. 어지시고 예술 방면에 연구가 깊고, 중국의 유명한 전한이가... 지금 국가 가사를 쓴 분입니다.

(중략

   아주 어지신 분입니다. 내가 그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 기억나시는 거 있으시면 어떤 영향 받으셨는지...?

: 각 방면에 처신하는 태도라든가... 우리는 그 때 연극도 했습니다. 연극을 연출하는데 있어서도 이경손이가 감독하고 했는데, 나도 그 때 연극에 참여하게 됐는데 말이야. 내 동작하는 각본에 있어서 아주 말이야... 연극 지도를 아주 잘해주셨죠.

: 제목이 뭐였죠?

: 일본이 상해에 들이친 후에 애국적인 예술가들이... 반일 그런 연극하는데 전창근이, , **** 이 몇 사람이 함께 연극을 했습니다. 역시 일본놈과 투쟁하는 연극이죠. 말은 하지 못하니까 무언극을 했죠. 이경손이 연출을 해가지고 한 거죠.“사망선을 넘어간다는 연극이었죠. 일본놈이 말야...

: 전창근 씨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 전창근이는 말야. 바로 우리 옆집에 있었습니다. 상해 임상 학교에서 미술 교육을 하면서 전창근도 예술하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말야 친근하게 지냈죠. 이경손이보다 전창근이 하고 접촉이 제일 많았습니다.

: <양자강>을 어떤 회사에서 어떻게 제작하게 됐는지, 제작 경위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 그렇습니다. 우리 그 때 말이야... ... 조선 예술 사업하는 사람들이... 이경손이, 전창근이, ***, 김광주... 소설 쓴 사람이죠. 한국에서는 이름있는 작가죠. 우리 넷이서 동방 예술협회를 탄생했습니다. 조직해가지고 이 영화를 찍기 위해서 동방예술협회를 조직했죠. 조직해가지고 상해 고성영화공사가 있습니다. 촬영소... 고성... 고독한 고자, 별 성자. 고성영화회사하고 계약을 맺었습니다. 합작한 게 아니고 이 사진을... 양자강을 찍은 후에는 조선으로 나갈 수 있다. 이래가지고 외국까지 진출할 수 있다. 고성영화회사에서 말야, 동의해가지고 합작해 찍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찍게 됐습니다.

: 그러니까 합작입니까?

: 합작해 찍은 거죠. 동방예술협회하고 고성영화회사하고 합작해 찍었죠그땐 자금도 없으니까... 그 땐 아무 기재도 없으니까, 고성영화사에는 촬영장비도 다 있으니까, 그래도 명의상 합작해 찍었죠.

: 실제작비는 고성에서 댄 거군요?

: 그렇죠. 고성 영화에서 댄 거죠.

(이하 다음 회에)

 

나로서는 영화 <양자강>을 관람한 분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지만 제작에 참여한 분은 최채 선생이 유일하다. 그를 만나게 된 건 일제강점기 상해파 한국영화인 연구논문을 쓰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으로 그를 만난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메일 : khh933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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