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근의 영화100년사] 미지의 감독 정기탁

안태근 | 기사입력 2021/08/24 [16:20]

[안태근의 영화100년사] 미지의 감독 정기탁

안태근 | 입력 : 2021/08/24 [16:20]

               영화 <애국혼>                                                                    © 인디포커스

 

[인디포커스/안태근(문화콘텐츠학 박사/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정기탁 감독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중국 상해로 가서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인 항일영화 <애국혼>을 감독·주연한다. 그는 한 때 한국영화사에서 미지의 인물이었다. 중국에서 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국내에 기록이 희귀했다.

 

그의 <애국혼>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1997EBS의 광복절 다큐멘터리 <일제강점기의 영화>가 방송된 이후이다. 북경전영자료관에서 그가 남긴 현존하는 유일한 영화 <상해여 잘있거라>를 발굴하는 수확이 있었다. 그리고 수십 장에 이르는 그의 영화 스틸이 소개되었다. 그와 관련한 필름의 부재 이유는 중국문화혁명 때 많은 필름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애국혼> 등의 스틸 발굴은 귀중한 수확이었다.

 

그리고 정기탁 감독의 영화인생이 필자의 논문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방송 이후에도 그의 행적을 더 조사하고자 상해로 북경으로 연길로 중국 대륙을 헤맸다. 그가 왕년에 활동했던 상해에 있던 영화박물관에서 1920년대 영화잡지를 뒤졌지만 자국(중국)의 영화 기사는커녕 온통 할리우드 영화 기사로 가득 찼다.

 

연길에선 당시 같이 활동했던 조선족 최채 씨를 만나 당시의 <애국혼>의 제작 상황과 영화관람 소감을 들었다. 정기탁을 만난 분을 만났다는 것은 기적과 다름없다. 정기탁의 <애국혼>이 발견된다면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 발견을 넘어서는 쾌거임에 틀림없다.

 

정기탁을 처음 내게 소개한 이는 고 이영일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예술' 잡지에 그의 존재를 처음 알렸다. 그리고 한국영화사 다큐를 만든다는 나에게 꼭 정기탁을 밝혀내라는 주문으로 그를 찾아 중국 땅을 찾아 나선 것이다.

 

북경전영자료관에서 처음 <애국혼>의 스틸을 보았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이것은 한국영화사에 올라야 하는 소중한 역사기록이다라는 확신으로 몇 차례 더 중국을 왕래한 후 논문을 쓰기 위해 만학도가 되었다. 졸업 논문 "일제강점기 상해파 한국영화인 연구"는 한국외대 정책과학대학원의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되었다.

 

평양 수옥리의 방앗간 집 아들 정기탁은 1920년대 배제고보를 다녔다. 그러나 현 배제고등학교, 배제대학에도 그의 서울유학 기록은 없다.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버린 학적부, 그는 이래저래 미지왕이다. 논문을 완성할 즈음 그의 최후가 궁금해졌다. 1937년 상해에서 귀국한 그의 기사들이 신문의 한 면을 장식했는데 왜 사망기사는 없을까?

 

함께 일하던 방송작가까지 동원해 당시 신문을 다 뒤졌지만 어느 신문에서도 관련 기사를 찾을 수 없었다. 1960년 부산일보라는 신문에 실린 그의 친구 손용진 카메라맨이 그가 대동강에서 기생과 뱃놀이 하다 죽었다더라는 말이 그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글이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말인 게 우선 "~했다더라"라는 확증 없는 말이고 그처럼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의 최후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는다.

 

고 이남호 화백에게 들은 또 하나 귀가 뜨이는 얘기가 전설 속의 인물인 정기탁 배우를 만났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정기탁을 만난 유일한 분이다. 18세의 학생이던 그가 조일제가 설립한 계림영화협회로 자신의 친형 이명호 배우를 자주 찾아갔다. 그 자신도 영화계에 관심이 많아서였다.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인 반도호텔 근처에 자리한 영화사를 갔는데 거기에서 정기탁을 만난 것이다. 정기탁은 뼈가 굵고 선비풍은 아니었다는데 이미 구면이라 이 화백이 가면 굵은 평양사투리로 어 동생 왔어?” 하며 반겨주었다는데 키가 크고 서구형의 현대풍의 미남이었다고 기억한다.

 

인터넷 시대를 맞아 정기탁 감독의 조카인 정영익 씨를 인터뷰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정영익 씨는 서울에서 살다가 1986년도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뉴욕에 살고 있다. 그가 인터넷으로 내가 쓴 정기탁 감독의 글을 읽고 연락을 주어 정기탁 감독에 대한 더 많은 일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죽음의 미스터리도 풀렸는데 대동강 익사는 사실이었다. 배가 전복되어 한복 입은 친구들은 옷이 구명튜브 역할을 하여 살아났는데 마카오 양복을 즐겨 입던 그만 죽었다고 한다. 미지의 감독 정기탁, 우리는 그를 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항일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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