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근의 영화100년사]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 윤백남(尹白南)

인디포커스 | 기사입력 2021/07/20 [09:29]

[안태근의 영화100년사]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 윤백남(尹白南)

인디포커스 | 입력 : 2021/07/20 [09:29]

 

▲ 윤백남(尹白南) 시나리오작가 겸 감독    ©인디포커스

 윤백남(尹白南)은 시나리오작가 겸 감독, 제작자이며 연극인, 소설가, 방송인이다. 그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던 그는 분명 천재성을 갖고 있는 이다. 그는 본명이 윤교중으로 1888년생이며 1954년 9월 29일 별세하였다. 지금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초창기 한국영화를 태동시킨 장본인이다. 당시는 호를 이름 대신으로 사용하던 시절이다. 일제 조중훈을 조일제로, 석영 안석주를 안석영으로 하는 식이다. 그래서 그도 윤백남으로 불리었다.

 

한국 최초의 대중소설은 1919년의 <대도전(大盜傳)>으로 윤백남의 소설이다. 고려 말 공민왕 시기, 신돈의 오만한 정치 참여에 주인공 무룡이 부모의 원수를 갚고 무리를 규합하여 나라를 바로 세운다는 내용이다. 동아일보에서 <수호지>를 연재 후 쓰인 것으로 수호지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는 후에 <회천기>(1932), <흑두건>(1932)같은 소설도 집필하였다.

 

한국 최초의 극영화는 만주 국경지대에서 있었던 활극을 영화화 한 김도산 감독의 1923년작 <국경>인데 이 영화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영 하루 만에 종영하게 되었고 이 영화를 기억하는 이도 없어 공식 인정받지는 못한다. 그리고 1923년 4월 9일,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 장려용으로 만들어 상영한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서>(전 2권, 1021피트)가 최초의 극영화로 기록된다. 홍보영화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를 조선총독부가 그에게 의뢰하여 만들게 한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신문물 도입기였다. 어린 나이인 11세에 경성학당에 입학한 그는 16세에 졸업을 했던 영재다. 특히 어학에 천재로 문필가로서의 소질도 보였다. 그후 그는 인천항에서 모험에 가까운 일본 밀항을 시도하여 고쿠라로 가서 고학생이 된다. 그는 현립 반조우중학 3학년에 보결로 입학하였다. 무일푼에 밀항으로 일본에 온 그는 우여곡절 끝에 동경에 자리 잡은 것이다.

 

윤백남은 와세다 실업중학 본과 3학년에 한국인 최초로 입학하였고 졸업한다. 이후 국비생 50명 중에 한 명으로 선발되어 와세다대학 정치학과 학생이 된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정치과목 수강에 제한을 두자 도쿄관립고등상업학교로 전학하여 면학에 주력한다. 결국 전문학사를 따기까지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좌절하지 않았던 그이다.

 

그즈음 그는 신(체)소설 <불여귀>, <쌍옥루>, <단장록> 등을 읽고 연극운동을 꿈꾼다. 그리고 이인직을 만나는데 그는 훗날 <치악산>, <설중매>, <은세계> 등의 신소설을 쓴 소설가이다.

 

윤백남은 귀국 후 유학생활 중 알던 이의 추천으로 수형조합에 부이사 직급으로 근무한다. 그곳은 조선척식주식회사의 전신이었다. 그는 일 년 간 근무하고 퇴사하여 대일신보사 기자로 입사한다. 이곳에서 조일제와 더불어 극단 문수성을 창단하기 전까지 일한다.

 

그는 문수성에서 연극을 하던 중 안종화의 소개로 (주)조선키네마로 가서 <운영전>을 각본, 감독한다. 안평대군의 애첩인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을 그린 내용으로 여주인공으로 김우연을 캐스팅하였다. 그러나 외모도 영화적이지 않았고 윤 감독과의 스캔들이 벌어져 어수선해지며 영화는 큰 적자를 본다.

 

이후 그는 서울로 와서 이경손, 나운규, 주인규 등을 중심으로 백남프로덕션을 만들어 <심청전>을 제작한다. 그러나 결국 낭패를 보고 그는 수출을 상담한다며 일본으로 간다. 그리고 연락두절이 되었는데 그는 귀국해 김해 합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결국 영화계를 떠나 시골로 낙향한 셈이다. 백남프로덕션은 해산되고 그들 멤버는 고려키네마사로 가서 이광수 원작의 <개척자>에 참여한다.

 

그는 이후 한국 최초로 개국한 경성방송국의 조선어방송과장으로 근무한다. 그의 활동은 가히 전천후라고 할 수 있다. 1953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의 학장을 지내고 대한민국예술원 초대회원이 되었다. 이렇듯 한국사회 개화기에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한 그는 한국영화사 초창기의 중요 인물로 기록된다.

 

 

 

<이메일 : khh933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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